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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지난 여름 사이 성격이 바뀌어 버렸어

수시로 MBTI 검사 결과가 바뀌는 당신. 사실 지난 여름 사이에 바뀐건 내 '성격'이 아닐 공산이 큽니다. 그냥 눈앞에 펼쳐지는 상황에 쉴새없이 적응하고 있을 뿐입니다.

“나, 지난 여름 사이 성격이 바뀌어버렸어” – 요새 자주 듣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난 여름, 고빈도 정신 상담과 전기치료, 향정신성 약물을 집중적으로 퍼부은 게 아니라면, 별 실질은 없는 말입니다.

아울러 최근 겪은 부정적 경험이나 중대한 라이프 스타일 변화로 인해 성격이 변했다는 주장도 심심찮게 보입니다. 인터넷에서 목격한 다음과 같은 말이 특별히 제 뇌리에 남아 있네요.

"(한껏 권위를 실은 톤으로) 올초부터 ENTJ에서 INTJ를 거쳐 INTP로- 격한 변화를 겪어온 찐 T형 인간으로서 말하는데....(이후 장황한 뻘소리-후략)"

-인터넷 상의 아무개

그런데 ‘성격을 바꾼다’는 건 그렇게 쉽게, 단기간 안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성격은 언어의 매개를 거치지 않고서는 직접 관찰 가능하기도 어렵고(관찰 가능한 것은 행동 뿐입니다. 행동을 넘어서는 패턴, 나아가 '성격'은 '해석 행위'의 개입을 거쳐야 합니다) 계량 또한 무척 어렵습니다. 성격은 인간의 행동의 패턴, 그 중에서도 특히 그 사람의 기질의 근원에 가까운 것들이 있지 않을까-라고 의제된 추상적 구조에 가깝습니다. 우리의 의식적 통제에 직접 연결된 대상이 아니므로 뜻대로 바꿔나가는 건 무척 어렵습니다.

치즈를 보고 앞뒤 안 재고 달려든 쥐가 쥐덫에 걸려 다리 한쪽을 잃었다고 가정해 보죠. 고통스러운 사고 이후로 그 쥐는 치즈를 볼 때마다 조심스럽게 행동하게 되었습니다 — 이때, 그 쥐의 성격은 ‘충동적’에서 ‘신중함’으로 바뀐 걸까요?

보통 "성격이 변화했다," "성격을 바꾸려 부단히 노력했다"라고 말하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실제로 하고 있는 건 ‘성격 변화’가 아닌, 행동을 상황에 '적응'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상황에 적응하는 건 지극히 인간적이고 정상적인 행위입니다. 생존을 위한 자연스러운 반응이기도 하고요.

​적응을 잘하는 사람은 감정 지능이 높다고 말할 수 있겠죠. 사람의 행동을 결정하는 요인들에는 많은 게 있습니다 - 그 행위에 대해 나 자신이 느끼는 감정, 상황에서 내게 기대되는 행동, 행동시 기대되는 보상, 주변인들과의 관계, 행동을 통해 타인에게 내보이고 싶은 모습 등…. 이런 여러 요인을 고려하면서 충동을 조절하고 행동을 조정해 나간다는 건 지능 없이는 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주변 사람 한 명을 정해서 그 행동을 쭉 추적 관찰해 보세요. 각기 다른 상황, 다른 관계 속에서 행동과 말투를 어떻게 달리해 가져가는지를 관찰해 보는 겁니다. 회사에서 회장님과 독대할 때, 신입 직원에게, 관심 있는 이성에게, 코스트코에서 환불을 거절 당했을 때, 법정에서 마주친 소송 상대방에게, 친숙한 어릴 적 친구에게…. 변화무쌍한 모습이 때론 가식적이기도, 혹은 분열적으로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우리의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성격 변화를 수반하지 않고도, 스펙트럼이 넓은 행동을 할 수 있는 게 바로 인간인 것이죠.

지난 여름 사이에 바뀐건 성격이 아닐 공산이 큽니다. 그냥 눈앞에 펼쳐지는 상황에 쉴새없이 적응하고 있을 뿐입니다. 특히, 성격이 변했다고 단정하는 근거가 mbti라면, 실제로 바뀐 건 <온라인 성격 검사지의 측정값>일 뿐입니다.